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서울 살 때 벽제 화장터를 몇 번 간 적이 있다. 관도 두어 번 들어 본 것 같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곳 풍경은 참 독특하다. 망자를 보내는 공간. 어디로 보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보낸다. 몇 개의 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족들은 처량한 목탁 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 처량한 5음계 비슷한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찬송가, 그리고 통곡 소리를 함께 듣게 된다. 죽은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화장 절차가 끝나고 유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동생을 보낸 기독교인인 한 아주머니였다. 동생의 불멸의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천국으로 갔을 거라는 확신이 무척이나 강하셨던 것 같다. '참 이상하지... 불 속으로 동생 몸이 들어가는 걸 보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글쎄 말이야. 동생이 우리 바로 위에서 자기 몸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거 아냐.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난 그렇게도 슬펐을까. 동생이 뻔히 자기 육신을 보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천국으로 갔으면 기뻐할 일인데. 천국이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때 이르게 보내도 그렇게 가슴 아파할 일이 아닐텐데.
벽제 화장터가 망자를 보내는 곳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 곳은 산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유골을 처리해 주는 사람한테 웃돈을 얹어 주지 못하게 유리로 막힌 방. 전광판으로 된 대기표를 보면서 화장 과정을 지루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운구차에서 관을 내려 화장터로 옮겨 가는 과정을 도와 주는 어깨 넓은 청년의 90도 허리 꺾는 경례. 환경 오염 시키지 말라고 분쇄된 유골 분말을 모아 두도록 한 추모 동산. 저 쪽에 주차되어 있는, 빈자들을 위해 구청에서 무료로 대여해 주는 운구차들... 망자는 망자이지만 산 사람은 산 사람들의 세상의 규칙을 따르고 산다. 박목월 시에서처럼,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 아닌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트리오는 추모의 정서를 담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그의 곡은 엘레지悲歌로 시작한다. 묵직한 첼로의 저음과 바이올린의 가슴을 후비는 소리.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피아노. 아렌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1번은 차이코프스키 곡과 거의 일맥 상통하는 곡이다. 3악장 엘레지 듣고 있노라면 눈가가 촉촉해진다. 얼마나 아름답든 얼마나 슬프든 아니면 슬프도록 아름답든, 이 음악을 듣는 이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사망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든 간에 슬픔을 감싸 안는 위로가 필요한 세상이다.
2005년 8월 2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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